복음의 첫 관문, 인천

“주님, 우리는 부활주일 한국 땅 제물포에 도착했습니다. 이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한국 백성을 얽매이고 있는 죄악의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제물포에 상륙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첫 기도문 中에서

 

인천은 문호가 개방된 이후 선교사들이 첫 발걸음을 내딛은 곳으로 인천 기독교 역사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복음의 개항지, 인천

인천항(구 제물포항)은 개항과 동시에 복음이 흘러오는 첫 관문 역할을 했다. 1880년대 조선은 열강의 제국주의 도전 앞에 굴욕적인 문호 개방을 하게 됐지만 하나님은 이마저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다. 제물포항은 당시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나 수도 서울에 가장 가깝고 중부에 광대한 상권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입지적 조건에 유리해 원산항과 함께 개항장으로 선택됐으며 대부분의 나라와 통상조약이 이뤄졌다. 이러한 여건으로 인천항을 통해 선교의 개척자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게 됐다.

공식적으로는 미국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스크랜턴이 인천항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한국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됐다. ‘배재70년사’에 의하면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머물던 7월 19일에 한 모임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감리교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인천 최초의 교회인 제물포교회(현 인천 내리교회)의 설립 역시 이러한 시기에 진행됐다고 한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인천

인천은 1887년에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에 파송한 노병일에 의해 전도 활동이 개시되었으며 제물포 선교의 첫 열매로 세워진 내리교회를 통해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강화 그리고 인천해 앞에 산재한 무수한 섬들, 경기도까지… 경계를 뛰어넘는 복음 전파로 황해도 남부, 충청도 북부를 포함하는 광대한 선교기지가 마련됐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복음의 전파를 위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조선 민중들이 현대적인 교육과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점에서 많은 선교학자들은 인천 개항은 침략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설명한다.

 

인천 부흥 운동

1907년의 평양에서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한국인 신자들이 모인 합동대사경회에서 회개를 통한 성령의 역사는 전국 곳곳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의 불길은 인천에서도 일어났다.

1907년 3월에 두 한국인 형제가 평양에서부터 인천에 와서 일련의 집회를 인도했는데, 그 때 온 교회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 뒤이어 나타난 것이 이용도 목사의 부흥운동이었다. 1932년 12월 29일부터 1933년 1월 7일까지 인천의 남녀 대사경회에 조신일, 이용도 목사를 청빙해 부흥회를 열었는데, 신령한 은혜를 풍족히 받아 각 처에서 새벽기도회가 열렸으며, 많은 결신자들이 나왔다.

 

해방 후 연합 선교 활동

해방을 맞은 한국교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 청산을 두고 교단의 분열, 교파간의 대립을 시작했다. 여기에다 6·25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남한에서의 이념 간 분열과 정종유착, 4·19혁명, 5·16군부 쿠데타 등을 통해서도 갈등이 지속됐다. 이러한 진통과 상처를 진정시키고 치유한 것은 대형부흥집회를 통한 은사였다.

인천은 감리교를 중심으로 큰 교세를 형성했으며 다른 교단은 열세를 띄었다.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감리교 교회들만 크게 부흥하고 있어서, 인천의 성결교와 구세군 등 몇몇의 교회는 교세가 미약해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개신교의 연합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복 후에 제일장로교회가 설립됐으며, 성결교회 등 다른 교파의 교회들도 그 교세가 성장 상태에 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미군의 병참 보급기지화로 인천은 사방에서 모여든 타지 사람들과 1950년 6·25전쟁으로 피난 온 이북 사람들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그 중에는 장로교 신도들이 많았다. 그래서 광복 후에 세워진 인천제일장로교회가 모체가 되어 순식간에 곳곳이 장로교회가 설립 확장 되고 여러 교파의 교회가 세워지게 됐다.

인천 교계는 1950년 후반부터 상호 협력하는 연합선교활동을 해오다가 1960년대에 와서야 연합회를 조직하고 활동에 돌입했다. 6·25전쟁 중에 시급한 것은 이북에서 피난 온 교인들의 구호와 가족, 친인척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피난민의 구호활동을 전개하면서 연합활동의 필요성을 자각한 성도들은 교역자들과 장로들이 중심으로 1952년 4월 ‘이북신도대회 인천지부’를 결성했다. 그리고 이에 협력하는 각 교파간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의 모임이 자연스럽게 연합활동으로 발전됐다.

‘인천기독교연합회’ 정기총회는 1962년 3월 31일 율목감리교회당에서 50여명의 총대가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됐다. 1970년대에 진입하면서 대형 연합집회가 정착되었으며, 이는 인천 전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80년대: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

1980년대는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이 되는 때며, 한국 기독교 선교 2세기를 열어가는 시기다. 이를 맞이해 한국교회는 각 교파별 기념사업은 물론 전국적으로 연합해 한국 기독교 백주년 기념사업회를 구성했다. 인천기독교연합회에서도 사업준비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이 때 괄목할 만한 사업은 백년 전, 미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의 첫 상륙지이며 처음 기도를 드린 인천항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일이었다. 오랜 시련과 각고 끝에 5년여 만에 인천시 중구 항동에 기념탑을 건립하는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선교 제2세기를 맞이하면서 국내를 넘어 세계 선교가 시작됐다. ‘88세계복음화대성회’를 준비하며 인천기독교연합회도 ‘88인천복음화대성회’를 거행할 만큼 성장했으며, 세계 선교를 지향할 만큼 인천의 교회들도 성장기를 넘어 성숙기에 들어갔다. 1990년대로 넘어서면서 인천기독교연합회는 문화 선교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그동안 애써 뿌린 씨앗이 열매로 드러났으며 인천 교계의 협력으로 인천기독교회관까지 건립했다.

 

21세기 인천 

인천이 가진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는 오늘날 기독교 인구 비율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세계성시화운동본부에 따르면 인천은 전체 295만 여명의 인구 중 95만명이 크리스천으로, 복음화율은 33.3%에 이르고 있다. 도시 인구 3분의 1이 기독교인이 되는 축복 받는 도시가 됐다.

1883년 개항이 된 후 서양의 모든 문물과 문화가 인천을 통해 유통이 됐다. 한국교회가 질타를 받고 잘못된 관행으로 몸살을 겪는 이 때, 한국 선교의 출발지 인천에서 영적 쇄신과 변화의 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아이굿뉴스 “인천, 제물포 개항과 동시에 한반도 선교의 ‘문’ 열다” 의 내용을 요약, 정리.